• 제32회 미술품경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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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t. 040

숙종대왕 肅宗大王 1661-1720
시고 詩稿 2점
1704년(갑신)
종이에 먹
29.7x44.4cm, 24.3x52.3cm
액자/추정 KRW 50,000,000-100,000,000

출품작은 새로 발굴된 숙종대왕의 글씨 두 점이다.

숙종肅宗(1661-1720)은 조선의 제19대 국왕으로 1675년에서 1720년까지 46년간 장기간 재위하였다. 숙종은 경덕궁敬德宮(경희궁慶熙宮)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났다. 1667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3세의 어린 나이에 부왕 현종이 급서하면서 즉위한다. 1674년 음력 8월에 13살의 어린 나이로 조선의 임금으로 즉위한 그는 수렴청정을 받지 않고 그 어린 나이에 누구 간섭없이 직접 나라를 통치하였다. 숙종이 조선을 다스렸던 기간은 조선이 개국된 이래 붕당정치가 가장 활발했던 시대였다. 숙종의 치세는 시작부터 크고 작은 정치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숙종은 즉위한 뒤 창덕궁에서 지냈으나 어지러운 정국으로 혼란스러울 때면 경희궁으로 와서 지내곤 하였다. 경희궁에는 승휘전承輝殿이라는 전각이 있었는데, 승휘전은 광해군이 경덕궁을 영건할 당시 세자의 정침으로 건립된 것이다. 광해군은 1616년에 경덕궁을 영건하기 시작하여 1620년에 마쳤다. 승휘전은 이 시기에 조성되었다. 경희궁이 완공되고 동궁의 첫 주인은 소현세자昭顯世子였다. 1655년에 승휘전을 헐어 창덕궁 수리공사의 자재로 사용하려 하였으나, 승휘전이 세자의 정침이라는 이유로 실행되지 않았다. 현재 승휘전은 소실되어 위치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궁궐지宮闕志>에는 융복전隆福殿 동남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숙종 24년인 1698년에 중궁전 소속 주방에서 일어난 불이 승휘전으로 옮겨 붙어
건물이 전부 타버렸다. 세워진지 80년도 못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1698년 숙종은 자신이 세자 때 머물던 경덕궁 승휘전에 한밤중 불이 옮겨붙어, 그곳에 있던 나인內人 두 명이 불에 타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 숙종은 참담한 마음을 안고 글 한 편을 종이에 적는다.
첫번째 작품은 이 때 지은 글로, 숙종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承暉殿先自天廚起火 深夜蒼黃未及走避
兩內人燒死尤可驚慘
萬丈烈炎連斗牛 可憐白骨燼餘收
無限煩寃無處觧 天陰兩濕聽啾啾
승휘전이 수랏간에서부터 불이 나 한밤 중에 창황하여 달아나지 못하고
두 나인이 불타 죽었다고 하니 더욱 놀랍고 참담하였다.
만 길이나 되는 거센 불꽃 북두성에 잇닿을 듯, 가련하다 불타고 남은 뒤 수습한 백골이여.
한없는 번뇌와 원통함 풀어줄 곳 없고, 어둑해지자 내리는 빗방울 소리만 후득후득.

숙종은 경희궁에 새로이 정자를 짓고 가끔 이곳을 찾아 관악산을 바라보며 꽃놀이를 즐겼다. 1704년 갑신년 겨울이었다. 숙종은 광명전光明殿의 서쪽에 정자를 짓게 하고 이름을 '춘화정春和亭'이라 하였다. 그러나 준공 때에는 가보지 못하고 이듬해 가을, 8월 중순에 마침 영소전永昭殿에 일이 있어 처음 이 정자에 가보았다.
두 번째 작품은 이 때 지은 시의 친필이다.

歲在甲申之冬 爲治亭舍于光明殿之西 命名春和
越明年秋八月中旬 有事于永昭殿 遂臨此亭
新閣崢嶸暎翠南 霜天秋色葉先含
使人一上忘歸意 佳景今辰正賞堪
갑신(1704)년 겨울, 광명전의 서쪽에 정자를 짓게 하고 이름을 춘화정이라 하였다.
이듬해 가을 8월 중순에 영소전에 일이 있었기에 드디어 이 정자에 임하였다.
새 집이 영화당, 취한정 남쪽에 우뚝도 하니, 서리 내린 하늘에 잎이 먼저 가을 빛 머금었네.
사람 시켜 한 번 오르게 하니 돌아갈 뜻 잊었다나, 아름다운 경치를 오늘 아침에야 즐긴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