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8회 미술품경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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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t. 033

연행증별첩 燕行贈別帖 : 훈곡 홍희준 薰谷 洪羲俊에게 -

1794년(갑인)
종이에 먹
44.5x36cm
첩/추정 KRW 10,000,000-30,000,000

출품작은 훈곡 홍희준이 1794년 청나라에 사행을 갈 때 무사히 다녀올 것을 기원하며 그의 친구, 지인들이 써준 연행증별시첩이다.
홍희준은 이계 홍양호가 경주부윤으로 나가 있을 적 임소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초명은 '낙준樂浚'으로, 후에 희준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홍희준은 태어나면서 바로 홍양호의 동생인 홍정한의 부인 이씨가 데려다 키웠다.홍희준은 16세(1776년)에 매승의 칠발을 모방하여 칠흥七興을 지었고, 일찍부터 경사에 통달하였다. 34세 되던 1794년 2월에 정시庭試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같은해 여름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선발되었다. 같은 해 홍희준은 부친 홍양호를 수행하여 북경에 다녀왔다.

청나라 연행은 홍희준은 생애에서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중국 국경에 들어선 뒤 중국의 복제, 산천 등에 관심을 갖고 이를 『전구傳舊』에 기술해 놓았는데 「청인불복의관론淸人不復衣冠論」과 「청국창업군신론淸國創業君臣論」 등이 대표적이다.
두번째 연행은 이후 1826년 정사의 자격으로북경에 간 것이다. 홍희준은 이 연행에 아들인 도애 홍석모를 데리고 갔다.
홍희준은 전구 외에도 『오복융후록五服隆厚錄』, 『대관大貫』, 『완역대지玩易大旨』, 『도서연상圖書衍象』 등의 저술을 남겼다.
이 첩에 시를 쓴 인물은 총 36명으로, 그 중김근순金近淳, 권준權晙, 서준보徐俊輔, 오태증吳泰曾, 강준흠姜浚欽 등 십여명은 홍희준과함께 1794년(갑인) 정시庭試 문과文科에 급제한 인물들이다.

참고문헌 |
이군선, 「훈곡 홍희준의 언어와 문자에 대한 인식」, 『한국문학연구』 제6호, 2005, pp.191-214